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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어떤 게임일까? (feat. 문명의 디자인 철학) 본문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이다". 이 말은 시드 마이어의 게임 철학을 매우 잘 나타내는 문장으로 널리 쓰여 왔습니다.
문명 시리즈는 '문명하셨습니다' 라는 밈이 나올 정도로 중독성이 큰 게임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런 세간의 시선과 높은 평가와 달리 저는 문명 시리즈를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드리기는 어려운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문명이 '엄청 재미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리시죠? 저 또한 대학생 시절 문명5 를 하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밤을 세운 사람이지만, 이상하게도 문명을 하면서 여타 다른 게임들처럼 '너무 재미있다, 짜릿하다, 등골이 시린다,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같은 감정을 느낀 적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는 좀비처럼 책상에 앉아 승리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마우스를 딸깍하는, 클릭 시뮬레이터의 플레이테스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드는 게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문명 시리즈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왜, 문명 시리즈에 제 소중한 시간을 갈아 넣었을까요? 저는 게임이 유저에게 제공하는 '경험'에 초점을 두고 문명 시리즈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문명을 하는 이유 : '신이 된 듯한 경험? feat. 전지전능함'
게임을 시작하면, 유저는 문명을 선택해서 고대시대부터 현대시대, 혹은 미래시대까지 키워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게임을 시작할 때, 아래와 같이 2개의 유닛이 주어지죠. 생각보다 초라하죠? 모든 문명의 시작도 결국 하나의 부족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자 이제 도시를 펴 볼까요? 적당한 장소에 도시를 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게임은 혼수 목록을 점검하는 시어머니처럼 여러 선택지를 들이밉니다.
과학 정책을 정해야 하구요. 사회 제도도 정해야 합니다.
사회 제도를 발전 시키다 보면 정책 카드를 얻게 되는데, 이런 정책 카드를 장착해서 문명을 발전시키는 효과를 얻습니다.
도시에서 어떤 건물/유닛을 생산할지를 정해야 하구요.
현재 보유한 유닛들도 잘 조종해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근데 마우스로 한땀한땀.. 하셔야 합니다. 자동공격은 없거든요.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면, 도시 주변의 타일들에 시민을 배치해서 도시를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각 타일은 식량과 망치라는 산출물을 뱉어냅니다.
식량이 많으면 인구가 늘어나고, 망치가 많으면 건물/유닛 생산이 빨라집니다.
문명6 의 경우, 위처럼 ‘총독’ 시스템이 있어 각 도시에 특정 혜택을 주는 관리인을 배정할 수도 있습니다.
아참, 사람이 살아가는데 종교가 또 빠질 수는 없죠.
다른 문명을 만났네요. 뒤통수를 치기 위해 호감 스택을 쌓아볼까요?
작은 도시국가들과 친하게 지내면 자다가도 떡이 생깁니다.
음 그런데 이거 말고도 말이죠. 문명6 에는 유저가 관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매우 많습니다.
위인 영입, 거래, 외교 등등 선택지가 매우 많죠.
핵심은, 정말로 하나의 문명을 키워나감에 있어 내가 직접 해당 문명을 어떻게 키울지를 세심하게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선택지를 거쳐, 내 문명을 강대하게 키워내었을 때의 그 뿌듯함은, 여타 RPG 게임에서 캐릭터를 성장시켰을 때보다도 큰 쾌감을 전달해주기도 합니다. 뭔가 든든하다는 감정도 들구요. 흔히 얘기하는 ‘뽕맛’이 매우 크죠.
수많은 선택지를 제공함으로써 유저가 전지전능함과 유능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문명 시리즈 재미의 핵심입니다.
흥미로운 선택이란 무엇일까? : 문명의 디자인 철학
그렇다면 어떻게 각 ‘선택’을 흥미롭게 만들 수 있을까요? 게임에서의 매 ‘선택’은 ‘위험’과 ‘보상’이 뒤따릅니다. 예를 들어 레이싱 게임에서 빠른 차는 핸들링을 구리게 디자인하곤 하죠.
그런데 이런 위험과 보상의 관계가 너무 단순하고, 결과가 뻔히 보이면 그것은 흥미롭게 느껴지기 어렵습니다.
문명은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도시에서 유닛을 생산하게 되는데요, 처음 어떤 유닛을 뽑을지를 선택하는 결정부터 해당 문명의 초반 스노우볼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스타크래프트로 따지자면 초반 빌드를 결정하는 느낌일까요?
흥미로운 선택의 전제 조건 1 : 상황에 따라 선택지의 매력도가 변화한다
문명은 각 결정이 흥미롭기 위해서는 각 선택지가 위처럼 상황에 맞는 복합적인 보상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게임을 하다 보면 각 순간 순간에 좋은 판단을 내렸지만 스노우볼링을 굴리지 못해 후반에 너무 큰 격차가 벌어지는 경우도 있고, 장기적인 판단만 내리다가 야만인들에게 도시가 박살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중요한 건, 현재 어떤 상황이 펼쳐져 있는지에 따라 각 선택지의 매력도가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선시되는 선택지가 있다? 어떤 상황이라도 A 선택지가 B 선택지보다 낫다? 그럼 선택지를 고르는 행위가 그리 재미있게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화로운 상황이라면 도시를 성장시키기 위해 일꾼이나 개척자를 뽑는 게 좋겠지만, 당장 전쟁을 해야 한다면 궁수를 뽑는 게 맞겠죠. 다만 궁수를 뽑게 되면 그만큼 성장이 느려질 것입니다. 문명에서는 유닛을 뽑는 것 뿐만이 아니라, 위에 설명한 과학기술, 사회 정책 등의 시스템에서 주어지는 모든 선택지가 상황에 따라 먹음직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문명6 에서는 첫 유닛으로는 정찰병을 뽑는 게 무난하게 이득이라는 공식도 있죠. 전사보다는 훨씬 약하지만, 맵을 빠르게 밝힘으로써 장기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시드 마이어는 이러한 선택의 집합이 유저의 플레이스타일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이런 결정들을 흥미롭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언급합니다.
흥미로운 선택의 전제 조건 2 : 정보 제공 (Better too much than sorry)
막상 흥미로운 선택지를 만들어 놓고, 유저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 되겠죠. 그래서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나칠 정도로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실제로 문명을 하다가 모르는 것이 나왔을 때 우클릭을 하면 위처럼 문명 백과사전이 나오는데요, 이 백과 사전은 게임에서 필요한 설명 뿐만 아니라 관련된 역사적인 배경까지 제공해 줍니다. TMI 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저같은 인터넷 망령들에게는 이것도 좋은 사료로 보이네요.
그래서 게임을 만들 때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습니다. 몬스터로 좀비가 나왔을 때, 굳이 게임에서 설명해 주지 않아도 좀비가 왜 위험한지는 유저가 보기만 해도 바로 알기 때문이죠. 문명이 과학기술/사회정책/불가사의 건물들에서 익숙한 소재나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정보 전달 측면에서 직관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 디자인의 심리학 :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은 틀렸다
많은 게임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이 알고리즘과 수치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게임을 만듭니다. 그런데 시드마이어는 게임 디자인에 있어 ‘심리학’이 제일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례로 ‘승자의 모순(The Winner Paradox) 를 드는데요.
위처럼 최종 전투력이 1.5 인 유닛과 0.5 인 유닛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1.5 인 녀석이 이겨야겠죠. 3배 차이가 나니까요. 실제로 전투 시, 승리 확률은 3배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유저가 1.5 전투력 유닛을 들고 있을 때 이기는 건 너무 당연한데, 본인의 유닛이 0.5 인 경우에도 AI 의 1.5 짜리 유닛과 싸워 이길 때가 있었습니다. 개발자가 그런 상황을 겪고 나니 전투 매커니즘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느냐고 묻자, 게이머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죠.
플레이 테스트 후 피드백을 받아보니, 유저들은 본인이 1.5일 때 이기는 건 당연하고, 0.5 상황에서 이긴 것은 본인이 전략을 잘 세워서 이긴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알고리즘과 데이터만으로 밸런스를 맞추려 했다면, 위와 같은 상황을 최대한 만들지 않아야 했겠죠. 하지만 그런 접근 방식은 게이머들을 진정으로 만족시키기 어렵습니다. 시드 마이어는 게이머 자신의 실력을 어느 선 이상으로 착각하게끔 디자인해야 게이머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2:1 과 20:10 의 전투는 결과가 거의 비슷해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플레이어는 2:1 (플레이어가 2) 전투를 패배했을 때는 납득하지만, 20 : 10 (플레이어가 20) 전투를 패배하는 것은 납득하기 매우 힘들어한다는 것도 지적합니다. 즉, 밸런스를 맞출 때는 이런 미묘한 심리학적인 부분을 고려해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시드 마이어의 은혜겠지요.
그리고 AI 디자인에 있어서도, AI 가 플레이어와 거의 같은 수준의 정교한 AI 를 갖기 보다는 게이머가 적절한 자극과 경쟁의식을 주고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는 정도로만 디자인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게임을 즐기는 것은 게이머지, AI 가 아니기 때문이죠.
시드 마이어의 게임 개발 철학은 위의 4가지로 압축됩니다.
- Interesting Decisions : 흥미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자
- Learning / Progress : 성취욕을 가지도록 디자인하자
- One More Turn : 지속적으로 다음 단계를 기대할 수 있게끔 하자
- Replayability : 매 판을 새로운 느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자
지금까지는 1번에 포커스를 맞춰 설명했지만, 문명을 하다보면 위의 4가지가 정말 잘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결정이 좋은 결과를 냈을 때, 강한 성취욕을 느낄 수 있고, 내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을 조망하기 위해 플레이어는 계속해서 다음 턴으로 넘어가죠.
또한 수십 개가 넘는 문명과 다양한 맵, 매번 바뀌는 스타팅 포인트와 인접 문명들로 인해, 유저는 새롭게 시작하는 판을 신선한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이다’ 이 말은 문명의 게임 철학을 대표하는 문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택지의 집합이 곧 게임 그 자체라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그러한 선택들로 인해 유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가 중요한 것이죠.
문명에서는 이러한 흥미로운 선택지를 통해 신비한 불가사의를 짓거나, 다른 문명을 겸손하게 만드는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거대한 대륙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신이 된 것 같은 전지전능함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작은 부족으로 시작해 우주로 진출하는 찬란한 문명을 키워내는 시드마이어의 역작, 문명을 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추가 : 문명5 와 문명6 의 차이
시드마이어는 신작 개발에 있어 1/3 전략을 취한다.
1/3 은 원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군사, 외교 과학 같은 부분은 유지한다.
1/3 은 종교처럼 부가적인 요소를 어떻게 개선할지 고민한다.
1/3 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추가한다.
그래서 문명6를 하다 보면, 적응이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다. 2/3는 기존에 있던 시스템이니까.
나무위키에는 전작과의 차이점이 별도 문서로 되어 있을 정도로 파고들면 많긴 한데… 제일 큰 점은 두 가지 정도로 보인다.
심시티
문명5 에서는 불가사의나 특수지구(도서관 같은 과학력을 주는 등, 특정 목적성을 가진 건물) 같은 건물은 지으면 그냥 스탯을 주는 역할이었는데, 이제는 불가사의나 특수지구를 ‘특정 타일에 직접 배치’해야 한다. 문명5에서는 건물을 짓긴 하지만 실제 공간을 차지하지 않았는데, 문명6 에서는 심시티를 잘 고려해서 지어야 한다.
사회정책
문화 산출을 이용해 ‘민주주의’같은 사회의 방향성을 선택하고, 빈 슬롯에 획득한 정책 카드를 끼우는 방식. 과학기술 다음으로 중요하다.
소회
문명6 는 문명5 에 비해 선택지가 더 늘어났다. 어떻게 보면 흥미로운 선택지들이 더 늘어났다고 볼 수 있겠다. 문명5 충이었는데, 문명6 를 해보고 나서, 문명6 가 머리가 조금은 더 아플지언정,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라고 느꼈다.
다만, 선택지가 많다고 해서 게임의 난이도가 더 어려워지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신난이도여도 문명6 가 온몸 비틀기를 할 여지가 더 많다 보니, 클리어에 있어 약간 더 수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여전히, 문명은 100 턴까지가 제일 재밌다. 100 턴이 지나면 약간 클릭 시뮬레이터가 되는 경우가 많고, 전투 피로도가 매우 높다. 모든 유닛을 하나하나 조정해야 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기도.
참고 링크
- https://gamelog.kr/641?category=304422
- https://www.ipn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4142
- https://m.thisisgame.com/webzine/gameevent/nboard/226/?amp;page=8&n=31480 (6번 번역 기사)
- https://gdcvault.com/play/1012186/The-Psychology-of-Game-Design
- https://www.gamespot.com/articles/meier-on-crafting-the-epic-journey-full-keynote-video-inside/1100-6253256/
- [GDC 2012: Sid Meier on how to see games as sets of interesting decisions] : https://www.gamedeveloper.com/design/gdc-2012-sid-meier-on-how-to-see-games-as-sets-of-interesting-decis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