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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자의 권리를 부정할 권리가 있는가? <서울대 토론한마당>

GoldGiver 2019. 10. 9. 17:29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버스를 탄 후 관악산을 내려가던 중, 현수막에 쓰인 글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우리는 타자의 권리를 부정할 권리가 있는가?”

<SNU 토론 한마당>에서 “우리는 타자의 권리를 부정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진행한다는 홍보용 현수막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리고 잠시 영화관에 들러 놓고 온 모자를 분실물 센터에서 찾아보는 시간 동안에, 또는 횡단보도를 건너며, 이 주제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타인의 권리는 이미 (일부분)부정되고 있으며, 또한 부정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언뜻 보면 저 문장을 보고 사람들이 극단적이며 반인륜적인 발언이라고 하며 원색적인 비난을 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타인의 권리가 부정되어야만 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출발점에 가깝다.

이제 토론의 논제로 쓰인 문장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자.

1. 권리에 대하여

먼저, 권리라는 것은 무엇일까? '권리'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심상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건전한 토론을 위해 먼저 이 단어의 함의를 어느 정도 정의해놓고 지나가도록 한다.

개인의 권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해당 개인이 주장할 수 있는 권한과 이득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 노동자의 처우와 관련하여 '한 주의 근로 시간이 XX시간을 초과해서는 안된다' 같은 주장을 본 적이 있다. 이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를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라고 내세웠다.

하지만 이 '권리'라는 것이 과연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며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의미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노동자의 권익을 볼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록 노동자의 처우는 매우 혹독해진다. 산업혁명 시기, 어린이들은 공장에서 석탄 가루를 마셔가며 다람쥐처럼 쳇바퀴를 돌렸고, 중세 시기, 소작농들은 영주의 갑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즉, 우리가 위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개인의 권리라는 것은 해당 개인이 속해 있는 집단과 시대에 따라 가변적이며, 권리는 개인이 살고 있는 사회의 통념이나 가치관, 합의에 의해 조정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이 당연한 것처럼 주장하는 '개인의 권리'는 근본적으로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은 치안이 매우 좋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는 '안전한 사회에서 살 권리'를 얘기하며 한국을 홍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치안이 좋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치안이 좋은 것은 개인의 천부적인 권리에 해당하는 영역이라 절대적인 존재가 우리에게 선물한 것인가?

결코 아니다! 치안을 좋게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희생을 치르고, 나와 타인들로 구성된 사회는 돈을 걷어 비용을 치르고, 만약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누군가 책임을 짊어지기에 한국의 범죄율이 낮은 것이다.

아까 치안의 예에서 보았듯, 개인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의 권리를 침범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불철주야 일하는 경찰관은 야간에 가족과 시간을 함께할 권리가 없는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포기하면서 사회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결국 특정 영역의 권리를 잠시 포기하더라도, 자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의 권리(예를 들면, 생계유지와 가정 부양)를 쟁취하기 위해 희생을 치루는 것이다.

일례로, 멕시코를 보자. 멕시코는 한국에 비해 치안이 좋지 않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그렇다면 멕시코에 사는 사람들은 '안전한 사회에서 살 권리'가 없는 사람들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즉, 개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이러한 권리가 실현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갑자기 개개인의 권리가 매우 다양하고 가변적일 수 있다는 얘기를 꺼낸 이유는, 개개인의 권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개개인의 권리를 존중할 수 없다는 것과 동치인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개인의 개성을 자아실현이나 행복추구권과 같은 일견 숭고해 보이는 가치와 엮어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며 이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이 '개성'을 표현할 권리는 부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얼마 전,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밝혀졌다. 이름은 이춘재로,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살인이 너무 좋고, 살인을 멈출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만약 이춘재씨가 좋아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이고, 그것이 자아실현이며 동시에 행복을 추구하는 길이라고 하자. 이춘재의 개성이 '살해 행위'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개성을 표출할 권리를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춘재씨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 - 이 경우에서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행위 - 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에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개인의 권리'가 가지는 명확한 한계이다. '개인의 권리'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개인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개인의 권리'라는 것은, 그 개인이 살아가는 집단과 시대에 맞게 사회에서 규정되고 제한되며 다듬어진 인공적 영역에 가깝다.

이는, 개인의 권리가 이미 일정 부분 부정되고 있으며, 부정되어야만 개개인의 권리가 존중될 수 있는 사회가 작동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개인의 권리를 주창하는 사람들도, 타인의 권리가 그 사람의 권리를 실현시키기 위해 제한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 부정에 대하여

앞의 권리에 대한 논쟁과 비교하여, 부정이라는 단어의 뜻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부정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조금 더 명확히 함으로써 더 나은 논의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짧은 부연설명을 붙인다.

위의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나는 부정이라는 의미를 '제한'이라는 의미에 매우 가깝게 사용했다. 이는, 집합의 모든 요소에 대한 개별적인 부정이 이루어져야만 그 집합을 부정한 것이라고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즉, 집합에 A, B, C라는 요소가 있을때, A라는 요소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B, C라는 요소에 대해서는 수용을 한 경우도 전체 집합에 대한 부정에 가깝다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집합의 모든 요소에 대해 부정을 취해야 비로소 그 집합에 대한 부정이 이루어진다고 가정하자. 개인의 권리도 결국 각 부분들에 대한 작은 권리들의 집합인데(예를 들어, 안전한 사회에서 살 권리, 근무시간이 너무 가혹하지 않을 권리,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권리 등, 권리는 정말 다양하다), 사실 이는 셀 수 없이 많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권리라는 큰 파이를 이루는 조각들은 점점 늘어나게 된다.

만약 이러한 작고 미세한 모든 조각들을 전부 부정해야 비로소 개인의 권리라는 큰 파이에 대한 '부정'이 이루어진다면, 애초에 무언가에 대해 '부정'한다는 행위는 가능하지 않으며, 이는 논제 '개인의 권리를 부정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문장을 공허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권리를 부정할 권리가 있는가?

이 문장을 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침범할 수 없는 금자탑으로 표현되는 '권리'라는 단어를 파헤쳐, 이것의 실체에 대해 이해하고 그 본질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울대학교 토론대회 <SNU 토론한마당>에서는 다음과 같은 참고도서 목록을 제시하였는데,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참고자료 (4종)『분배냐, 인정이냐? 정치철학적 논쟁』 中 ‘1부1장과 2부2장’, 낸시 프레이저, 악셀 호네트(김원식, 문성훈 옮김), 사월의 책, 2014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中 ‘자유의 두 개념’, 이사야 벌린(박동천 옮김), 아카넷, 2006
『바른 마음: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中 9장과 10장, 조너선 하이트(왕수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4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켄 로치 감독, 100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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