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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너무 똑똑하면 안된다? : 부끄러웠던 나의 어린 시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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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너무 똑똑하면 안된다? : 부끄러웠던 나의 어린 시절

GoldGiver 2021. 10. 6. 23:47

"여자는 너무 똑똑하면 안된다"

다분히 성차별적이고 절대 대중들 앞에서 써서는 안되는 이 말을 최근에 들은 적이 있다.
이런 말은 연애 시장에서 소외된 남자들이 오랜만에 모여 곱창 불판 옆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할 법한 대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상당수의 남자들이 이렇게 생각하거나, 혹은 인정하지 않더라도 위의 문장처럼 행동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정말로 똑똑한 여자를 싫어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왜 똑똑한 여자는 인기가 없다는 걸까?

於異阿異(어이아이)

우리 속담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라는 말이 있다.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듣는 사람의 기분이 달라진다는 뜻인데, 사실 맨 처음 던진 저 문장에는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함'으로 표현된 특성은, 사실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다'라는 것을 내포하기 위해 쓰인 것이다. 그런데 왜 '여자는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면 안된다' 가 아니라 '여자는 너무 똑똑하면 안된다'는 표현이 나온 걸까?
똑똑하다는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담길 수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경우,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편견이 담기기도 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대부분 똑똑한 사람에게 순수한 존경과 찬사를 보내기보다 열등감을 느끼며 상대방을 깎아내리려 든다. 물론 너무 똑똑해서 재수가 없는 사람도 더러 있을 수 있지만. 결국 똑똑한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과 남성들의 자격지심이 '여자는 너무 똑똑하면 안된다'는 명언(?)을 탄생시킨 것이다.

너무 똑똑해서 소시오패스가 되버린 셜록

너무 똑똑한 사람?

너무 불편하고 말하기 조심스러웠던 '그 문장'은 이제 잊어버리자. 핵심은 '남자든 여자든 너무 자기 주장이 강하면 만나기 피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똑똑함'과 '자기 주장이 강한 것'은 양의 상관관계를 보인다.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똑똑하다는 것은 지금껏 살아오며 자신의 생각이 대체로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시험이 됐건, 발표가 됐건 지금껏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며 높은 정답률을 기록했기에 '똑똑함'이라는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자기편향적인 존재이다. 자신의 판단이 옳았던 순간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다 보면 점점 더 자신이 내리는 판단이 '진실로' 옳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어떤 사람은 본인이 공학박사이지 심리학 박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영역(예를 들면 인간관계)에까지 본인의 견해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자신의 생각이 맞을 거라는 경험론적인 가치관으로 잔뜩 무장한 채.
하지만 그런 태도는 인간관계에 한하여 고난과 역경을 보장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날카롭게 따지는 태도가 공학에 있어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인간관계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물리 법칙의 집합으로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슬프지만, 공대생이 연애에 서툴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Go Back : 세상에는 옳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나는 스스로를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비합리적인 언행이나 프로세스를 보면 가슴속에서 답답함과 뜻모를 울컥거림이 올라오기도 한다.
비판과 지적을 많이 했었다. 물론 그러한 피드백은 언제나 '사실'과 '적절한 근거'에 기초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나를 되돌아보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었던 '사실'과 '적절한 근거'는 대부분 빈약하기 짝이 없는 '자기 주장'이었다. 그리고 남의 생각과 아이디어에 대해 '냉철한 피드백'을 주는 그 순간은 타인을 돕기 위한 이타심이 아닌 지적인 충족감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피드백을 주며 나 스스로가 뭐라도 된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때로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내 주장을 관철했다. 왜냐하면 내 말이 맞으니까. 내 말이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니까. 상대방의 주장은 송곳으로 후빈 창호지처럼 논리적인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구멍들을 찾는 것에 정신이 팔려, 구멍 속 너머 상대방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었다.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나는 구멍의 크기와 형태에 집중하는 사이 어느 순간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된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 지는게 이기는 거야

오랜 시간 끝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 똑똑하면 따뜻할 수 없다고 누가 그러던가? 나는 내가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을 불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부부와 연인, 혹은 절친한 친구끼리 누가 이기는 게 그렇게 중요할까?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내 말이 맞는 것 같아 답답한 감정이 생길 수는 있다. 만약 당신이 다투고 있는 상대가 언쟁이 끝나고 다신 보지 않아도 될 사람이라면 부디 맞서 싸워서 이긴 후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길 바란다. 하지만 의견의 대립이 관계의 파탄을 의미할 정도로 심각하지 않다면, 그리고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면, 한 발짝 물러서서 서로를 바라보자. 대부분 웃음으로도 마무리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예전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싸움을 보고 난 후, 아버지께 어떻게 그렇게 참고 넘어갈 수 있냐고 여쭤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그때 나에게 '지는게 이기는 거다' 라고 말씀하셨고, 난 오히려 아버지를 나무라며 문제를 회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 시절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누구의 말이 맞는지, 어떤 사람의 의견이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었는지였으니.

10년 정도면 조금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을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지는게 이기는 거라는 아버지의 말이 조금씩 와닿기 시작했다.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수십 년의 관계를 큰 굴곡없이 유지하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스스로 잘난 줄만 알았던 시절에 대한 부끄러움이 조금씩 고개를 든다. 그렇게 아주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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